바쁘지 않은 날은 불안하고, 멍하게 있는 순간엔 죄책감이 든다. 우리는 '생산성'이라는 키워드에 중독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일정표에 빈칸이 생기면 어딘가 모르게 손이 떨리고, 버스나 엘리베이터에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1분 1초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 여긴다. 그런데, 가끔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생각의 파편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그때. 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사실은 '뇌의 숨고르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멍때리기를 다시 보게 된다.
멍때리기, 뇌과학이 말하는 창의력의 원천
우리는 흔히 ‘멍하니 있다’는 것을 ‘쓸모없는 시간’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이 순간을 오히려 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상태 중 하나라고 말한다. 기본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가 집중하거나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을 때, 즉 멍때릴 때 이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이 모드에서는 과거 경험을 되짚고, 감정을 재조정하고, 미래를 상상하거나 창의적인 연결을 시도한다.
예술가들이 ‘영감은 산책 중 떠오른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멍때릴 때 뇌는 정보의 '정리정돈'을 한다. 인지적 부담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재구성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멍하니 있는 것은 생산성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한 충전 행위에 가깝다.
생각하지 않을 권리, 감정의 정화
시간 우리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척하면서 살아간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지금은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다’며 밀어두고, 상실감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도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외면한다. 하지만 감정은 언제든 출구를 찾는다. 억누르기만 하면 곪게 된다. 멍때리기는 그런 감정들이 조용히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요하고 아무 자극 없는 시간 속에서 감정이 흘러나오고, 흐름을 타며 정화된다.
이런 멍때리기 시간은 감정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최근에는 명상이나 요가 등 마음챙김 활동이 각광받는데, 멍때리기는 그보다 더 쉽고 자연스럽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우리는 마음의 여백을 회복할 수 있다. 감정은 때로는 말이나 글보다도 멍때리는 시간이 더 잘 소화시킨다.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정화의 방식이다.
디지털 시대의 저항, 의도적인 멍때리기
요즘은 온종일 ‘보는 것’에 시달린다. 이메일, SNS, 뉴스피드, 동영상까지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의 눈과 귀, 뇌는 쉬지 않고 정보를 소비한다. 이때 멍때리기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조용한 반격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잠깐이라도 디지털과 단절되는 시간. 이것은 ‘의도적인 공백’이며, 현대인에게는 필수적인 자기 돌봄의 시간이다. 이런 멍때리기는 시간 관리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집중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예비 동작이 된다. 프리미엄 호텔이나 사무공간에서 ‘멍때리는 공간’을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창밖이 보이는 긴 벤치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왜냐하면 현대인의 뇌는 숨 쉴 틈 없이 작동하다가 결국 과열되기 때문이다. 멍때리기는 무너짐을 예방하는 ‘느림의 휴식’이다.
마무리: 멍한 시간이 선물해주는 것들
멍때리기를 삶 속에 일부러 끼워넣는 일이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삶의 리듬을 찾는 일이다. 바쁜 도시의 소음 속에서 나만의 정적을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멍하니 있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놀랍도록 많은 걸 얻는다. 창의력, 감정의 회복, 자기 인식,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 잠깐 쉬어갈 수 있는 여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나다운 시간을 선물한다.